한국을 펜싱강국이나 양궁강국이라 하는 건 마치 세계요리대회에서 한국팀이 라자냐 부문에서 우승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을 라자냐강국으로 부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세계요리대회에서 라자냐로 경쟁해서 우승을 하든 그라탕으로 경쟁해서 우승을 하든 그것이 나라를 대표할 만한 어떤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라자냐든 그라탕이든 국내에서는 즐겨 해먹는 요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펜싱으로든 양궁으로든(핸드볼이든 사격이든 뭐든) 금메달을 땄다고 해서 그게 큰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도 펜싱이나 양궁을 즐기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취미로 입문하고 싶어도 어딜 찾아가야 하는지 알 수조차 없고 그나마 찾아 가더라도 입시생이 아니란 이유로 문전박대 당할 게 뻔하다. 펜싱이나 양궁을 접할 수 있는 건 4년마다 TV 화면으로 보는 게 전부일 뿐.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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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0 16:53

완벽하려면 모호해야 한다. 철학이나 종교의 언어가 모호한 건 모든 것을 아우르려 하기 때문이다. 모호함 속에서 다양한 의미가 도출되기도 하고 그 담론의 영역이 넓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담론의 텍스트가 수용자들에게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기 까닭에 모호함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방향에서건, 완벽하려면 모호할 수밖에 없다. 영화로 따지자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그런 경우다. 그가 만든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는 모호한 부분이 많다. 덕분에 다양한 해석과 유추가 회자된다. 하지만 기본적인 주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놀란의 주관적인 세계관이 투영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방대한 세계관을 영화라는 한정된 서사에 응집시키려다보니 불가피하게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제를 내레이션처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건 영화라는 예술적 장르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두세 시간의 런닝타임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반면 '곡성'은 다르다. '곡성'에서 모호함은 영화의 전부다. 관객을 속고 속이는 그 모호함을 걷어내면 사실 남는 게 별로 없는 영화다. 물론 나홍진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플롯, 그리고 오컬트란 장르를 훌륭하게 로컬화시켰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다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류의 영화는 아니란 얘기다. 깊이 있는 세계관이 담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 혹은 철학적 메타포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본 후 멍해지는 순간은 있다. 하지만 그 여운은 작품 내의 적과 아, 선과 악을 구분하는 데서 오는 혼란스러움일 뿐, 깊은 공상에 빠지도록 만드는 여운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을 곱씹을수록 깊이를 느끼는 게 아니라 찝찝함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그리고 찝찝함 느끼는 데에는 감독의 트릭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반전이란 건 생략을 통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한 편의 서사 구조가 있다면 그 서사의 부분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관객이 특정한 관점을 갖게끔 유도하는 거다. 이따금 비워야 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덜 생략함으로써 관객에게 힌트를 주는 복선을 만들기도 하고(예를 들면 일광의 훈도시처럼), 마지막에는 생략됐던 부분을 한 순간 드러내면서 물음표를 느낌표로 완성시키는 반전을 만들기도 한다. 완성도가 높은 영화일수록 이런 과정이 깔끔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곡성'은 관객을 속이는 데 몰두했던 만큼 잃는 것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게 외지인이 종구 일행에 쫓기는 장면이다. 결말을 고려해볼 때 이 장면에서 묘사되는 외지인의 모습은 개연성을 갖췄다고 하기 어렵다. 결말에서 드러난 외지인의 정체와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후반부 반전을 위해 시점마다 캐릭터의 특성을 바꾸는 건 삼류에나 어울리는 기법이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나홍진답지도 못했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좋은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깊이 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것. 적어도 내 취향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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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9 10:17

인터넷이 공론의 장을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믿음이었다. 인터넷이란 공간이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수용하는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런데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좀 다르다. 사람들은 토론을 하기보다는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들끼리 모이는 걸 더 좋아한다. 물론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살롱문화란 것도 생존이란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웠던 부르주아지들에 의해서나 가능했던 것처럼, 각박해지는 일상에 거추장스러운 토론보다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자기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터. 다만 이런 경향이 심화되다보니 외부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은 부족해지고 점점 극단주의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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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6 17:24

축구계의 상향평준화가 뚜렷해지고 있다. 선수 간 기량 차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고만고만한 선수들끼리의 대결에서 승리하려면 공간마다 얼마나 많은 선수를 둘 수 있느냐가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한 공간에 공격수보다 수비수가 많으면 공간이 막혀 공격이 어려워지고 한 공간에 수비수보다 공격수가 많으면 패스할 곳이 많아져 수비가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특정한 공간에서의 수싸움이 중요해진 것이다. 따라서 수싸움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서는 선수들이 쉴 새 없이 필요한 위치로 움직여줘야 한다. 다시 말해 경기가 유리해지거나 불리해지는 건 선수들의 활동량에 달려있는 셈이다. 이번에 브라질을 이긴 것도 2002년의 성과도 누누히 말하지만 체력 덕분,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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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3:02

"지혜로운 솔로몬이자 한심한 글쟁이여,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네! 꼬치꼬치 따지려 들지 말게나! 태어나셨나, 안 태어나셨나? 당연히 태어나셨지, 바보같이 굴지 말라고. 돋보기로 마실 물을 들여다보면 말이지 -이건 어떤 기술자가 말해준 얘긴데- 맨눈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들이 우글우글하다는 거야. 벌레를 보았으니 물을 마실 수가 있나. 물을 못 마시니 목이 타서 죽고 말겠지. 당장 돋보기를 깨부수게, 보스, 그러면 작은 벌레들은 다 사라진다네. 그러면 자네도 목을 축이고 다시 기운이 번쩍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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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8 23:42

1. 부자관계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잘 풀어낸 것 같다.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유능한 아버지를 둔 아들의 비애랄까. 상황상 유능한 아버지들은 대게 아들(혹은 딸이든)에 대한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능력 탓에 아들 또한 어느 정도의 싹수를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유능한 아버지들은 대게 아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적인 여건을 만들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그러셨듯 영화 속 영조도 "더 좋은 환경임에도 왜 공부를 게을리 하느냐"며 아들을 꾸짖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은 아들에게 부담감으로 전이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그런 아버지들의 기대감이라는 건 그 충족치가 늘상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들이 이루는 성과에 만족하는 경우가 적기 때문이다. 결국 일부러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칭찬보다는 질책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은 아들에게 있어 부담이나 스트레스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존경과 서운함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이런 복잡다단한 부자의 관계가 세밀하게 서술되어진다. 거기에 조선왕실이라는 상황적인 특수성과 영조의 괴팍한 캐릭터가 더해지니 이 서사의 클라이막스는 그만큼의 개연성과 사실성을 갖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도세자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 "왜 영조는 아들을 죽였을까?"란 물음에 대해 부자관계라는 근원적인 코드 속에서 영화 나름대로의 착실한 답을 찾았던 것 같다.


2. 배우에는 세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첫째로는 연기인 게 너무 티나는 배우들이다. 연기가 어색해서 자꾸 극적인 흐름을 깨뜨리는 배우들이다. 둘째로는 연기인 게 티가 나지 않는 배우들이다. 연기가 자연스럽고 극에 잘 녹아들어서 이들이 배우인지 영화 속 인물인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이들이다. 마지막으로는 오히려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 존재가 영화 밖으로 드러나버리는 배우들이다. 이들은 관객에게 너무도 큰 임펙트를 주기 때문에 영화적 몰입에서 이따금 벗어나게끔 할 때가 있다. 그 순간만큼은 영화를 보고 감탄하는 게 아니라 연기를 보고 감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에 마이너스가 되는 건 절대 아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묵직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대표적인 배우가 송강호다.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재밌다는 걸 넘어서 행복하단 느낌이 든다. 근엄한 목소리와는 거리가 먼 그가 어떻게 왕을 연기할까 의아했던 적이 있었지만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은 송강호의 연기 걱정이 아니었을까. 특히 후반부에서 사도세자가 죽기 직전 영조와 사도세자의 상상적인(?) 대화씬은 압권이었다. 이준익 감독의 말대로 짧은 시간 내에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을 모두 뱉어냈고 그 순간마다의 호흡 하나하나가 가슴에 콱콱 박혔다. 절정의 순간 목이 메이다 못해 쇳소리를 내는 부분은 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촬영 현장에서 배우가 저런 연기를 표현해낼 때 그것을 모니터링하고 있던 감독이 느끼는 어떤 전율, 희열 같은 건 대체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다. 이준익의 페르소나는 정진영이라지만 앞으로 그의 영화에 송강호가 자주 등장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3. 비교적 짧은 분량에도 무게감을 줘야 했던 정조 역에 소지섭을 캐스팅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극에 맞게 슬픈 눈을 가진 배우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잘생긴 외모였다는 정조에 대한 기록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소지섭과 춤사위라는 생소한 조합이 의외로 괜찮았다. 배우의 동양적인 선과 부채춤의 애달픈 절제미가 잘 어우러졌다. 다만 너무 친절한 편집이 흠이었다. 감독 입장에서야 관객을 염두한 편집이었겠지만 정조의 동작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일히 플래시백 컷들을 넣었던 건 다소 직설적이었다. 무언의 춤사위만 남겨 놓았다면 더 여운이 남는 메타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오점은 역시 문근영이었다. 촉촉한 실눈으로 엔딩을 감상해야 할 시간에 어색한 할머니 분장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실소가 터져나왔다. 작은 웃음소리들이 다른 객석에서도 들렸던 것을 생각하면 나만 그렇게 느꼈던 건 아닐터. 극적인 애절함을 위해 배우를 바꾸기보다는 분장을 선택한 건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노년 분장까지 염두해두었다면 애초에 문근영 같은 배우를 섭외하진 말았어야지. 문근영이 누군가. 이 나라의 대표 동안 배우지 않나. 아무리 피부를 노화시키고 주름을 만들다 한들 선 자체가 동글동글한 문근영의 얼굴은 누가 봐도 그냥 문근영 그 자체였다(헐리우드의 분장 기술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만큼). 아마 문근영의 노년 분장은 두고 두고 회자될 해프닝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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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4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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